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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족자 속 고승에게 붙어 있는 성가신 것 2017.06.09

누군가

from 이런저런 이야기 2017.06.09 17:43


지난주, 광화문에 있는

어느 영화관에서 목격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평일 오후 2시 무렵이었다.

내가 그런 시간에 영화관에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도서전 관련 미팅 시간을 잘못 계산했다.


평소 같으면 교보문고라도 어슬렁거렸을 테지만

그날은 너무 피곤하고 졸렸기 때문에

눈이라도 붙이려는 불순한 의도로 영화관을 찾았다.

다행히 객석에는 관객이 거의 없었다.


상영작은 <나는 부정한다>라는 영국영화였다.

같은 줄 가운데쯤에 여자 관객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런데 아까 그 여자 관객이 부시럭부시럭 움직이면서

뭐라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거다.

어느새 그 여자 옆에 앉은 남자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뭐야, 커플이었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을 때

여자의 목소리가 살짝 들렸다.

“―이러지 마세요.”


그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여자분은 막 엉거주춤 일어나

내가 있는 줄 끄트머리 쪽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

스크린 빛으로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란 모양이었다.


평소 불의를 보면 일단 피하고 본다는 것이

나의 부끄러운 세계관인데,

그때 내가 대뜸 끼어든 까닭은

잠이 덜 깬 상태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벌떡 일어나 여자 쪽으로 다가가며

“거기, 무슨 일입니까?”

하고 약간 목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드문드문 혼자 온 관객들이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영화관이라 다행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환한 곳에서 보면 내가 얼마나 겁먹은 얼굴이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치한의 태도는 전혀 달랐을 게 분명하다.


어둠의 힘을 빌어 나는 좀 더 크게 말했다.

“아저씨,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요!”

뒤쪽에 앉은 남자 관객 한 명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섰다.


그러자 치한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재빨리 출입문 쪽으로 도망갔다.

중간에 한 번 내 쪽을 돌아보았는데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가 거칠게 문을 열고 닫았기 때문에

로비의 불빛이 들어와

나는 봉변을 당하고 있던 젊은 여자가

떨면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 여자를 로비로 데리고 나왔다.

의자에 앉히고 직원을 부르려 하자

여자는 그러지 말아 달라며 작은 백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으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약간 울컥),

아까는 정말 당황했는데…(한숨)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학생 같지는 않았지만 무척 어려 보였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실례다 싶었는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혼자서 영화를 보러 이곳에 자주 오는데

여태 기분 나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

당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막돼먹은 짓을 하는 치한은 드문데

많이 놀랐겠다고 하는 식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얼굴이 아직 창백한 상태로 집에 가야겠다고 하기에

나는 극장 밖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했다.

그 치한이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머뭇거리기에 나는

“아까 그놈이 아직 어슬렁거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라고 얼른 설명하며

내가 이상한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명함을 건넸다.


여자는 내 명함을 받아들더니

눈물이 남아 있는 눈동자로

명함과 나를 몇 번인가 번갈아가며

빤히 쳐다보았다.


“북스피어 출판사?”

“네.”

“저, 미야베 미유키의 <누군가>라는 소설을 지금 읽고 있어요.”

“아, 정말요?”

“이 시리즈의 다음 권도 읽으려고 사두었고요.”

“<이름 없는 독>이랑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이요?”

“네(약간 웃음).”

“그, 그럼 혹시 지난주에 이 시리즈의 신작이 나온 건 알고 계신가요?”

“아뇨, 몰랐어요.”

“<희망장>이라고 5월 31일에 출간되었습니다(웃음).”

“아, 그렇군요.”


“네,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 신작 <희망장>에서는

소심한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가

서민생활밀착형 탐정으로 전직하여

마침내 도쿄의 낡은 건물에 탐정 사무소를 차리거든요.


대망의 첫 의뢰인은 이웃의 친한 아주머니인데요.

자신의 궁금증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 의뢰의 내용으로

잘 해결해 주면 당번제 쓰레기장 청소를

일 년간 면해 주겠다는 귀여운 거래를 제안하죠.”


가까운 서점에서 구입해 주시길.


이상,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위 성추행 사건은

<누군가>에서 스기무라 사부로가 겪은 내용입니다.

치한에게 나쁜 일을 당할 뻔한 여자를 구해준

스기무라는 결국 그분과 결혼합니다...


지금도 이따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 치한이 우리를 맺어준 셈이야. 그렇지?"

아내가 이런 말을 재미있다는 듯이 해 주는 것이 나는 기쁘다.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 꽤 시간이 흘러,

그때 그 치한이 무슨 짓을 하고 무엇을 하게 하려고 

어떤 천박한 말을 건넸는지 나호코가 가르쳐 주었다. 

순간적인 의분으로 내가 재빨리 행동을 취한 것을 나는 스스로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p. 155 


저도 언젠가부터 다른 불의는 참지만

치한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참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누군가 나서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더군요.

이 이야기의 교훈 또한 그러한 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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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제적 .. 스컬리 2017.06.09 18:3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와! 멋있다 하려고 했는데.. ㅋ
    누군가를 읽는다는 처자라길래 오오 인연인데!!
    했는데... ㅋ

    영화관에서 자리를 멀찍이 잡았다는 대목에서 눈치챘어야 하는데.. ㅋ
    (요즘은 거위 멀티플랙스 극장인데.. 서울은 아직그런데도 있나보다 했네요 ㅎ)

    소설 한번 집필하심이...ㅋㅋㅋ

    • 마포 김사장 2017.06.09 18:4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아유, 누군가 내용 그대로잖습니까.
      스컬리 님 정도 되면
      딱 보고 아셔야지.
      그건 그렇고 희망장 속 미션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셨지요?

  2. 김정희 2017.06.09 19:1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제가 경찰할때, 근무일지를 주로 팀장급에서 짜는데 새로온 젊은 남자순경과 근무 조금한 여경을 같은 순찰조로 짰었어요. 순찰차로 범인 추적하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남경,여경이 같이 입원했었어요. 둘이 2인실 같이 썼고 결국 사귀게 되어 결혼하더군요. 정말 남,녀 사이는 모르는거더라고요

    • 마포 김사장 2017.06.09 20:48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저도 언젠가부터 다른 불의는 참지만
      치한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참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누군가 나서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더군요, 흐음.

  3. 박은미 2017.06.10 11:1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희망장 다 읽어가는데 재미있고 마음아프기도 하고 다 읽기 너무나 아까워서 조금씩 읽고
    있어요. 그림자밟기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4. 라디오키즈 2017.06.12 18:08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도입부까지는 정말 두근두근 했는데...ㅎㅎ


내가 열 살 무렵의 일이다. 어느 겨울 아침,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바싹 야윈 승려 한 명이 쓰러진 채 발견된 적이 있다. 내 아버지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승려는 집 안으로 옮겨졌고 따뜻한 음식 덕분에 곧 기력을 회복했다. 아버지는 “병원에라도 가보세요”라며 얼마간의 돈을 건넸다. 그런데 승려가 고개를 저으며 마음은 감사하지만 자신은 이미 목숨이 다해서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담담히 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답례라며 찢어지고 헤진 보따리에서 족자를 꺼냈다. 항아리와 승려가 그려진 족자였다. 희한한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아버지와 엄마와 내 동생에게는 항아리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나에게만 항아리와 항아리 밖으로 목을 내밀고 있는 승려가 보였다. 내가 그 사실을 얘기했더니 승려는 내 아버지만 따로 불러서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족자 속 승려가 보였다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이제 나도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다, 이 족자는 세상의 모든 병으로부터 당신의 아들을 지켜줄 거다, 다만 족자 속 고승에게는 딱 한 가지 성가신 것이 붙어 있다, 곧은 마음만 있으면 물리칠 수 있는 성가심이지만 떠맡기게 되어 참으로 미안하다, 허나 당신의 아들에게 보이고 말았으니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고는 곧장 우리 집을 떠났기 때문에 생사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해가 바뀌어 내가 다니던 학교에 집단 눈병이 돌기 시작했을 때 과연 승려의 말은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눈병뿐만이 아니라 나는 흔해빠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단, 병에 걸리지 않은 건 ‘족자 속 고승에게 붙어 있는 성가신 것’의 정체를 알게 되기 전까지의 일이다. 아아,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그 정체가 대관절 무엇인지 궁금한 형제자매님들께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그림자밟기>를 읽어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시사인)


덧) 

미미 여사의 신작 <희망장>, 읽고 계시지요? 책 속에 들어 있는 카드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형제자매님들이 계셔서 한 말씀. 카드 아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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