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린 팽조가 쓴 소설에 관해 들은 건 작년 겨울,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친하게 지내는 편집자가 미테랑 대통령의 일화를 얘기하던 끝에 “꽤 오래전이긴 하지만 한국에도 번역돼 나온 적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첫소설>이라는 제목이다. 2002년에 출간되었는데 용케도 서점에서 초판을 구할 수 있었다. 판매가 영 신통치 않았나 보다. 하긴 대통령의 딸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프랑스 소설에 관심을 가질 독자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미테랑은 상원의원이던 1962년에 안느 팽조와 처음 만났다. 결혼한 마흔여섯의 정치인과 열아홉 살의 미술학도는 금세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마자린 팽조가 태어났다. 미테랑과 팽조의 관계가 세상에 공개된 건 1994년의 일이다. 스무 살의 마자린이 대학에 합격한 걸 축하하는 조촐한 자리를 주간지 <파리 마치>가 몰래 촬영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은 기사가 보도되리라는 걸 미리 알았지만 막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파리 마치> 미테랑과 그의 '숨겨진' 딸


그는 왜 언론의 폭로를 방관했을까. 일간지 <리베라씨옹>은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미테랑은 답을 가르쳐 주었다. 떠나기 전에 마자린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미테랑의 장례식에 참석한 마자린은 “아버지는 기사가 나를 괴롭게 만들 거라 여기며 걱정했다. 나는 오히려 기사로 인해 아버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될 테니 안심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비난을 받은 건 사생활을 침해한 <파리 마치>였다.


저자는 픽션일 뿐이라고 했지만 내가 읽은 <첫소설>에는 부녀지간의 애틋함이 잘 드러나 있었다. 미테랑은 마자린이 문학에 매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틈 날 때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딸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미테랑은 정치가이기 이전에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써낸 베테랑 작가였기 때문이다. 미테랑이 안느를 만나서 죽기 직전까지 보낸 1218통의 러브레터조차 안느 팽조의 동의하에 갈리마르에서 출판되었을 정도다.



그는 일생 동안 글을 썼고 집무실에서 비행기에서 별장에서 공식적인 사진을 찍어야 할 때는 서재를 배경으로 하거나 책을 들어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또한 파리 시내와 지방을 가리지 않고 출판사와 서점을 자주 방문하여 담당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출판사에서는 그에게 도서 카탈로그를 보내주었다. 대통령이 직접 전화하여 책을 주문한 뒤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서점에 들러 주문한 책을 받아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다양한 매체에서 자신의 문학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던 미테랑의 일화를 계간지 <라레트르>는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본인이 쓴 책이 나오면 여러 작가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78년에 <꿀벌과 건축가>를 출간했을 때는 ‘아포스트로프’라는 TV 독서 프로그램에서 미셸 투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와 함께 책을 소개하고 질의응답하며 토론을 벌였다.”


미테랑이 얼마나 책을 각별히 여겼는지, 대중들이 그런 대통령을 얼마나 뿌듯해했는지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일삼는 재래시장에서의 서민 코스프레가 식상해질 대로 식상해진 오늘, 차라리 동네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독자들과 만나고 <82년생 김지영>의 작가와 함께 한국 여성들의 고단한 삶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을 누군가 보여주면 어떨까. 본인이 감동적으로 읽은 책 얘기까지 곁들인다면 효과 만점일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그 후보에게 표를 던질 용의가 있다.(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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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클럽 2017.04.26 17:2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여기도 책 읽는 대통령이 보고 싶고
    나아가서
    도서관을 여기저기 마구마구 세우시는 대통령도 보고 싶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디오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우후죽순으로 대여점이 생기는 바람에 마음만 먹으면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시급은 3,000원이었지만 퇴근하면서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명작 시리즈를 왕창 가져다 볼 수 있으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수지의 개들>로 데뷔하여 <트루 로맨스>의 각본을 쓰고 <펄프 픽션>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입봉하기 전까지 비디오대여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영화를 공부했다는 기사를 읽고 자극을 받기도 한 터였다. 나도 이것저것 열심히 보면 나중에 시나리오를 쓰든 소설을 쓰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펄프 픽션>은 비디오테이프가 헤지도록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특히 존 트라볼타와 우마 서먼이 묘한 스타일의 머리를 찰랑거리며 척 베리의 <You never can tell> 리듬에 맞춰 디스코 비슷한 걸 추던 대목은 마주할 때마다 감탄했다. 정말 신나는 장면이다. 



대여점에는 매일 신프로가 한두 개씩 들어왔다. 그러면 사장은 프로당 스무 개에서 서른 개 정도를 대량 구입한다. 이 신프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당일 매출의 성패를 좌우하는 분수령이라 하겠다. 신프로를 빌리러 온 고객은 이쪽 대여점에 없으면 미련 없이 저쪽 대여점으로 가기 때문에 초반 회전율이 중요한 것이다. 고로 철저하게 VIP 고객에게만 빌려줬다. 그렇다면 대관절 VIP 고객이란 누구인가. 퇴근길에 빌려가서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철썩같이 테이프를 반납함에 넣고 가는 고객을 말한다. 이들은 매일, 사채업자가 일수 도장 찍듯 대여점에 들른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묻는다. “아저씨, 오늘 뭐 재미난 거 들어왔어요?” 그러면 나는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책상 밑에 쟁여둔 테이프를 척 하고 꺼내며 “그렇지 않아도 형제(자매)님이 오실 것 같아서 제가 하나 빼놨죠(웃음)”라는 식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비디오대여점 점원이었던 나는 지금과 달리 붙임성이 좋고 사근사근했다.


반대로 신프로를 빌려가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반납하지 않는 고객은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그랬다. 이런 조그만 비디오대여점에서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용했다. 훗날 박근혜 정부가 그런 걸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서른 개나 되는 신프로가 설령 당일에 대여되지 못하더라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에게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는다. 정권에 비우호적인 문화 예술인에게 하듯 노골적으로 탄압을 한 건 아니고, 이미 다른 손님들이 다 빌려가서 없다고 거짓말을 했을 뿐이지만. 물론 적절한 가이드라인은 마련해 두었다. 가령 스티븐 시걸이 주연으로 출연한 <파이널 디씨전>이 출시됐을 때는 이를 빌리러 오는 블랙리스트 고객에게 “저는 이 영화 별로더라고요. 심지어 스티븐 시걸이 비행기에 올라타기는커녕 시작하고 십 분 만에 죽는다니까요”라고 설득해서 “하이재킹 영화라면 단연 <패신져 57>이 낫죠. 웨슬리 스나입스가 최고의 연기를 펼칩니다. 보시고 재미없으면 대여료 돌려드릴게요”라는 식으로 신프로에 버금가는 구프로를 빌리도록 유도했다. 진지하게 권하면 십중팔구는 “그, 그런가요” 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아놀드 슈월츠제네거의 <이레이저>가 매장에 입고됐다. 이른바 ‘초대박 프로’였기 때문에 사장은 마흔 개나 구입해 놓고 VIP 고객에게만 빌려줘야 한다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비디오대여점 알바로 일한 지 어언 6개월, 그 정도는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거든요. 게다가 빼어난 안목으로 추천해 준 구프로 덕분에 블랙리스트 고객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정 무렵, 그러니까 내가 퇴근하기 직전에 기어코 사건이 벌어졌다. 오늘은 어떤 시리즈를 집에 가져가서 밤새 젊음을 불사를지 궁리하는데 나랑 비슷한 또래의 자매님이 가게 문을 열고 스윽 들어왔다. 그러고는 매장을 훑어보더니 벽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있어요?” 연방경찰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관리하며 증인이 위험에 처할시 그를 보호하는 동시에 증인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주인공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신무기를 들고 있는 장면을 찍은 <이레이저> 홍보물이었다. 마침 딱 한 개가 남아 있었는데 처음 보는 자매님이라 불안했다. 괜히 빌려줬다가 잠수 타면 나만 사장한테 경을 칠 게 뻔하다.


나는 테이프를 찾는 척하며 슬쩍 말을 걸어 보았다. 듣자하니 자매님이 대여점에 들른 사연인즉, 엄마 아빠의 여행으로 오늘 집이 무주공산이라 친구들을 불러서 술 마시고 놀기로 했는데 새벽에 심심할까봐 대충 빌리러 온 거란다. 아놀드 슈월츠제네거가 누군지도 모르더라니까. 마음 같아선 소파에 앉힌 뒤에 차라도 대접하면서 그렇다면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고 지금껏 감명 깊게 본 작품이 무엇인지 면밀히 조사하여 마침맞은 영화를 권해주고 싶었지만 캔맥주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가 무거워 보였던 데다가 나도 퇴근이 바빠서 그만두었다. 영화야 뭐가 됐든 관심 없고 얼른 친구들이랑 마시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레이저> 말고 <이레이저> 비슷한 걸로 빌려줘도 무방하겠구나 싶었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레이저헤드>를 꺼냈다. “손님, 찾으시는 게 없는데 이건 어떠세요. 제목은 비슷하지만 작품성은 이쪽이 낫거든요.” <이레이저헤드>가 늘 컬트적, 전위적, 그로테스크 같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술을 전부 마시면 기절할 텐데 영화 볼 정신이 있겠나. 보다가 잠들기로는 이 영화가 최고지, 라고 생각했다. 자매님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그러세요”라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불러주곤 표표히 대여점을 나갔다.


다음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반납함을 확인했다. 얌전히 들어 있었다, <이레이저헤드>가. 테이프는 삼분의 일가량 재생된 시점에서 멈춰 있었다. 30분쯤 관람하다가 때려 친 모양이다. “야, 이X아, 이거 무슨 거지같은 영화를 빌려왔어?”라는 비난과 “짜증나, 아까 그 호빵맨처럼 생긴 아저씨가 재밌다 그랬단 말이야!”라는 고함이 지금도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하긴, 욕을 먹어도 싸지.(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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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비아플라스 2017.03.30 19:56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도박이나 복권 같은 얘기 써보세요.
    아님 치질이나 무좀 걸렸던 얘기...
    그런게 재밌던데...

    • 마포 김사장 2017.03.31 01:23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이 기사 읽고 온 제보 가운데
      예전 하이텔 시절에 했던 영퀴방 얘기가 있어서
      '추억의 피씨통신, 영퀴방과 번개'에 대해
      써볼까 하는데 혹시 재미난 일화 같은 거 있으심까?

  2. 박은미 2017.03.30 23:03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김사장님은 글은 참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요.
    옛날 생각 나네요. 이레이저헤드는 머리 아팠던 기억이..
    컬트무비가 유행처럼 느껴졌었죠.. 델리카트슨 사람들도 그렇고..


소설 <거짓말이다>를 만들면서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 씨를 알게 됐다. 그 인연으로 올 초부터 김탁환 선생과 함께 시작한 <꽃바다를 구하라> 프로젝트의 '파티'란에 지난 달쯤 댓글이 하나 달렸다. 이런 내용이었다.


"세월호를 취재했던 한겨레 기자 정은주입니다. 김관홍 씨는 홍대와 연남동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술친구입니다. 참 좋은 프로젝트라 1회부터 반가웠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후원이 늦었습니다. 괜찮으시면 글 품앗이도 한번 하고 싶습니다."


김관홍 잠수사에 관해서는 이쪽에서 뭔가를 부탁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와중에, 후원도 후원이지만 글 품앗이도 한번 하고 싶다는 말이 정말이지 고마웠다. 본인이 한겨레에 쓰는 글도 바쁠 텐데.



정은주 기자가 김관홍 잠수사와의 인연을 글로 풀어낼 용기를 낸 건, 김 잠수사의 큰딸 때문이라고 한다. "초등학생인 큰딸의 꿈이 사회부 기자라고..." 그 얘기를 전해듣고 김 잠수사가 얼마나 훌륭한 취재원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회부 기자들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랬구나. 언젠가 먼 훗날 "그때 정은주 선배의 글은, 내가 사회부 기자가 되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스칼렛 오하라적 전개가 이루어진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힘내시길, 큰 따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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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션 임파서블 3>에서 톰 크루즈가 ‘토끼발’이라 불리는 화학무기를 가까스로 획득한 후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곳을 기억하시는지. 그때 깨어나자마자 인질로 잡힌 아내 줄리아를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장면을 보며 두 가지가 궁금했었는데 ‘대관절 토끼발이란 무엇인가’와 ‘톰이 줄리아와 함께 나쁜 놈들을 몽땅 때려잡은 중국의 저 마을은 어디인가’였다. 이번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곳은 ‘시탕’이라는 수향마을이다. 중국 양자강 이남에는 예로부터 못이나 하천이 아름다운 여섯 개의 마을이 있는데 이를 ‘강남의 6대 수향마을’이라고 한단다. 내가 얼마 전에 간 곳은 여섯 군데 수향마을 중에서 시탕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우전으로 6,000명가량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시골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지난 2월에 공중파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동양의 베니스’니 뭐니 하며 연예인들과 함께 조명했으니 곧 한국 사람들로 들끓지 않을까 싶다. 이미 내가 갔을 때 중국말과 한국말이 같은 비율로 들렸다. 척 보기에도 한국에서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아웃도어 차림의 떼거리 여행객이 많았다. 근처에 산악지대가 있는 것도 아닌 마당에 적당히 평상복을 입어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거야 내 생각일 뿐이고 아웃도어 복장은 아웃도어 복장 나름의 편의성이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실례인 듯도 하다. 입을 만하니까 입었겠지.


우전은 간선수로를 따라 동책과 서책으로 나뉜다. 동책에는 소설 <영웅문>에 등장하는 구처기가 강남칠괴와 대판 싸우다가 별안간 사람 키만 한 항아리의 밑바닥을 쌍장이산의 초식으로 들어 올려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시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객잔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 이채롭다. 청나라 말기의 모습을 재현한 각종 박물관과 기념관은 번다한 민속촌을 연상시킨다. 반면에 서책은 상대적으로 물길이 넓고 그 물길을 이용하여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인지 동책보다 정겨운 느낌이었다. 고즈넉한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늘어선 촌락과 상점에 불이 켜지면 그야말로 굉장한 장면이 펼쳐진다. 그동안 중국 여행을 숱하게 했지만 ‘다시 한번 꼭 와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처음이다.



두 시간가량의 서책 일주를 끝내자 날이 어둑해졌다. 마지막 여정으로 배를 탔다. 이 배에 관해 설명하자면 뒤쪽에서 사공이 노를 저어야 하는 나룻배 형태로 객실은 지붕이 막혀 격자무늬 창을 통해서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대략 여섯 명에서 여덟 명이 양쪽으로 마주보며 앉는 구조다. 뱃삯은 어른 한 명당 60위안이었으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만 원이 약간 넘을까 말까. 내가 탄 배에는 한국인 남성 다섯 명과 조선족 청년, 그리고 묘령의 중국인까지 일곱 명이 함께했다. 서책 끝에서 초입까지 일직선으로 30분가량 운행하는데 처음 얼마간은 다들 창밖 경치를 구경하며 탄성을 지르기 바빴다. 한데 좀 전에 얘기했듯 객실의 구조가 답답해서인지 중반쯤 지나자 자매님에게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저 아가씨는 혼자 여행 온 모양이네(웃음)”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젊은 사람이 대범하다”느니 “가까이서 보니 미인”이라는 논평이 여기저기서 왁자하게 들려왔다. 문제는 자매님의 맞은편에 내가 앉아 있었다는 거다. 다만 몇 살이라도 젊어 보이는 네가 말문을 트는 게 좋지 않겠냐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잠시 고민해 보았다. 과연 말을 거는 게 온당한가. 물론 나도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고 왜 혼자 이곳에 왔는지. 하지만 ‘다수의 한국인 중년 남성들①’과 ‘소수의 중국인 젊은 여성②’이 본의 아니게 한 공간에 갇히게 된 미묘한 상황에서 질문의 방향이 ②-->①이라면 몰라도 ①-->②의 경우에는 상대의 쓸데없는 오지랖에 귀찮아하거나 불쾌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른 생각이었다. 싸잡아 비난하자는 건 아니지만 의아하다는 형제님들은 ‘택시 기사의 오지랖’으로 포털이나 트위터를 검색해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다음으로,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왜 혼자 이곳에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고작해야 “Where are you from?” 정도가 최선일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게다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을 걸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면 그게 여자든 남자든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겁이 나거나 귀찮다. 내가 겁나거나 귀찮으니까 당연히 남도 겁나거나 귀찮겠구나 생각하면 도무지 말을 걸 수가 없다. 이런 증상은 “도나 기에 관심 있으세요”가 횡행할 무렵부터 점차 심해졌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예전에는 종로나 광화문 일대에서 활보하던 세력들이 언젠가부터 동네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어오는 바람에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근절되지 않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쳐 주면 좋겠다.


자기 얘기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매님은 시종일관 창밖만 바라보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여론은 “쯧쯧, 말 한번 못 붙이다니 한심하군”으로 바뀌어 있었다. “젊은 친구가 저렇게 소심해서야”, “그럴 거면 나랑 자리를 바꾸든가” 같은 말도 이어졌다. 그냥 내가 소심한 걸로 귀결돼도 상관없었으련만 나도 모르게 “저기, 혼자 오신 모양인데 제가 사진이라도 찍어드릴까요?”라며 찰칵찰칵 시늉을 한 건 내가 정말로 소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조선족 청년이 통역해 주었다. 결과는 호쾌한 거절. 그러자 이번에는 조선족 청년에게 “어디서 왔는지”, “왜 혼자 왔는지”를 중국말로 물어봐 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청년은 망설이다가 “그건 좀 실례인 것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지금껏 중국인은 시끄럽고 예의가 없으며 때때로 무례하기까지 하다는 식으로 틈날 때마다 험담을 해왔다. 어쩌면 그날 이후로 중국인 자매님 역시 비슷한 견해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은 시끄럽고 예의가 없으며 때때로 무례하기까지 하다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지사지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싫은 기색 하지 않고 이것저것 친절하게 거절해 준 자매님께,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하지만 이렇게나마 정중하게 사과드린다.(한겨레)


덧) 

제가 그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이런저런 서점들을 꽤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때 느낀 단상과 사진들을, 만약에 책으로 엮으면... 읽어보고 싶으실까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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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21 01: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차단된 자 2017.03.21 10:2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럼요, 읽고 싶죠!!!
    원래도 여행하는 이야기랑 (막 익스트림 스포츠 하고 밤낮으로 사람 왕창왕창 만나는 내용보다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거 적은 이야기가 제 취향~)
    서점이나 책 이야기 좋아하는데 거기에 김사장님 글발까지...
    지금 예약주문 받으셔도 신청합니다. @_@

  3. 박은미 2017.03.22 12:2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읽고 싶어요. 여행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 좋아해요.
    다카기 나오코의 책을 다 좋아하거든요.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중국인 무리들이나 한국인 무리들이 똑같이 시끄럽대요.
    여행까지는 아니지만 혼자 다니는 걸 즐기는 저도
    항상 느끼는 건데 아저씨들이 혼자다니는 여자를 보면 길에 떨어진 물건 대하듯 하는구나
    느낄 때가 많아요. 역지사지라는게 정말 어렵긴 해요.
    여자들도 남자들의 마음이나 아저씨의 마음을 잘 모르긴 마찬가지잖아요.

  4. 치치 2017.03.22 18:5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오, 저도 꼭 읽고 싶어요!!


2016년 3월 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대결이 벌어집니다.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구글의 자회사)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국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도서전 참석차 해외에 있었는데 현지에서도 다들 승패의 향방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약간 놀라기도 하고 흥미로워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습니다. 바둑은 몰라도 어쨌거나 최고수라고 하니 실수가 있다면 한 번쯤 질지도 모르겠다는 낙관적인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대국의 승리는 알파고에게 돌아갔고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별안간 세상이 바뀌었다’는 듯한 반향과 흥분과 혼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앞 다투어 이 사안에 대해 논평했고 전문가가 아닌 이들은 SNS에 나름대로의 분석을 쏟아내느라 바빴습니다. 제가 귀국한 뒤에도 여파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딥러닝, 싱귤래리티 같은 말들이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여기저기서 너무 빈번하게 호출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몇몇 기자들이 저에게 “인공지능과 관련한 소설이 뭐가 있을까요” 하고 묻더군요. 마침 북스피어에서도, 최근 <컨택트>의 원작자로 뒤늦게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 테드 창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낸 바 있어서 이를 포함한 소설들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재미난 뉴스를 읽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가명으로 일본의 어느 공모전에 출품되었고 1차 심사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기사였어요.


오랫동안 장기나 바둑 같은 게임 AI를 개발하는 데 공을 들이던 일본의 인공지능 연구자 마쓰바라 히토시 교수(공립 하코다테 미라이 대학)가, 이제 장기의 명인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2010년 이후로 소설 쓰는 인공지능 프로젝트(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눈치 없는 인공지능 프로젝트 작가예요’라고 합니다)를 통해 감성형 인공지능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SF소설 공모전인 ‘호시 신이치 상’에까지 소설을 출품하게 되었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1차 심사를 통과한 인공지능 소설가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 우울한 날이었다. 방 안은 언제나처럼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 씨는 무절제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쓸데없는 게임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입니다.


되풀이하지만 공모전에는 저자가 인공지능임을 밝히지 않은 채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품했다고 합니다. 1차 심사를 통과한 직후 저자의 정체가 인간이 아님이 밝혀졌을 때는 당연히 화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런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가, 컴퓨터의 감성은 어느 수준까지 자란 것인가 하는 분석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지요. 이에 대해 마쓰바라 교수는 당시 공개된 소설에 대해 “컴퓨터의 힘이 2할, 인간의 힘이 8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도입부에서는 날씨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인물을 묘사하라’는 식으로 인간이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팁을 충분히 주면 인공지능이 그에 대응하는 단어를 선택하여 문장을 생성하는 구조라는 것이지요.


마쓰바라 교수 팀은 차후 작가 호시 신이치와 고마쓰 사쿄의 소설을 분석하며 ‘그 작가를 그 작가답게 하는 작품의 특징을 추출하는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오리지낼러티를 흡수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마치 그 작가가 쓴 듯한 작품을 인공지능이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인공지능 소설가가 공모전의 1차 심사를 통과했다는 내용의 이런저런 뉴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호시 신이치 상’에 출품된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을 읽고 “소설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에 놀랐다”고 평한 심사위원이 SF소설가 하세 시토시 씨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스스로 문장을 읽고 학습해, 주제와 장르를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인공지능의 이야기를 발표한 바 있지요.


너무 일찌감치 번역되어 절판된 모양이지만 하세 사토시는 라이트노벨 『원환소녀』로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작가입니다. 2001년, 스니커 대상 공모전에 출품한 『전략거점 32098 낙원』이 당선되어 데뷔한 그는, 병이 있던 탓에 그대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되지요. 데뷔 때부터 SF계의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지만 2005년에 출간된 『원환소녀』 전까지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 무렵 집필한 작품인 『당신을 위한 소설(あなたのための物語)』 덕분에 비로소 판매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후에 그는 2015년 일본SF대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그때 스스로 그렉 이건(오스트레일리아의 SF 소설가, 국내에는 『쿼런틴』이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된 상태입니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신을 위한 소설』에서도 나노테크놀러지를 활용한 인지공학적 기술이 등장하는 등, 그런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지요. 




간단요약


1) 인공지능이 소설을 썼다는 뉴스를 보고 

2) 재미있겠다 싶어서 찾아보니 

3) 마침 그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심사한 소설가가 "인공지능이 소설을 쓴 이야기"를 썼다는 걸 알고 

4) 한국어판 소설로 펴내게 되었다... 뭐 그런 얘기입죠.



덧) 

마포 김 사장의 지령 40호 발송했습니다.

41호부터 받아보실 분은 아래 주소에 메일 주소를 남겨주시길.

http://www.booksfear.com/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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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은미 2017.03.17 00:1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아서 더 자주 들어와 보게 되더라구요..
    어제 혹시나 검색해보니 새책이 나와서 바쁘셨구나.. 했지요.
    책은 어제 주문하고
    뒤늦게 지령을 확인하고..
    7월이 너무나 기다려 집니다.
    여름엔 역시 미미여사님의 에도물이지요.

    • 마포 김사장 2017.03.17 00:59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지령을 읽으셨다니 아시겠지만,
      매일매일 거의 퍼져서
      뭘 쓰고 자시고 할 경황이 없었어요.
      일단 신간이 나왔으니 숨을 돌리지만
      다음 주부터는 또...(후아)

      그렇더라도 4월 1일에는 꼭
      이곳에 들러주세요.
      그날의 이벤트는,
      정말 재밌을 예정이니까요. 헤헤.

  2. 네모 2017.03.17 00:23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미 배송중 ^^

  3. 이리나 2017.03.17 10:09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표지가 아주 오묘하네요.
    많은 것을 담으려 애쓰신 흔적이겠죠?

    지금 주문하러 갑니다~

    해마다 4월 1일 이벤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특별했던 것 같아 잔뜩 기대됩니다 ^^

    • 마포 김사장 2017.03.17 11:5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바로 그렇습니다.
      '인공지능+봄이 오고 있음+아아, 장차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를 형상화한 표지인 것입니다 ㅎㅎ.

      이번 4월 1일 이벤트도 만만치 않아요.

  4. 차단된 자 2017.03.17 13:2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작가의 수지>도 아직 못 읽었어요.
    같이 주문하러 갑니다~!

  5. 스컬리 누나 2017.03.21 11:22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신간이 줄줄이 예정되어있다는 것이 기대감 업하네요.

    거의 매일 알라딘 신간코너를 뒤적이고 북스피어를 따로 검색하다가
    오늘 한 건 건졌네요..ㅋㅋ

    그나저나 사놓은 책은 언제 다읽나..

    밤에 책 읽을라면 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