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여름,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열흘쯤 머물면서 <반지의 제왕> 촬영지를 둘러볼 요량이었다. 이 여행을 위해서 나는 마감일이 한참 남은 칼럼들을 미리 쓰고 출연하는 라디오도 2주치 분량을 녹음해 두었다. 그런데 가까스로 칼럼+라디오를 처리하고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려울 때 내가 늘 찾아가는 모 출판사 대표였다. 그는 나에게 원고를 검토해 달라고 했다. 영미권 추리소설인데 처음에는 끌렸지만 다시 보니 판매를 예측할 수 없어서 추리소설깨나 읽은 “너가 읽어보고 감상을 말해줘”라는 부탁이었다.


원고고 나발이고 없는 열흘을 즐기다 오려 했는데 이 무슨 아닌 밤중에 랜섬웨어 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딱 부러지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럼 보내주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러쿵저러쿵해서 못 읽었다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써야 할 원고 때문에 챙겨가는 책도 두 권이나 있다. 편집도 되지 않은 원고까지 읽을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나는 문제의 원고를 샘소나이트 여행용 가방 맨 아래에 처박아 두고 거기에 원고를 처박아 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뉴질랜드는 국토가 넓은 관계로 캠핑카를 이용하는 여행객이 많다. 이들을 위해 전국 곳곳의 사이트에는 샤워장과 취사장을 무척 잘 조성해 두었다. 캠핑카 여행이 이렇게 쾌적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호텔을 옮길 때마다 낑낑대며 짐을 쌌다 풀었다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성수기의 복닥거리는 호텔을 피해 느긋하게 드라이브를 즐기며 영화 속에서 엘프들이 살던 리븐델과 호빗 마을이 조성돼 있는 마타마타와 운명의 산 모르도르가 있는 통가리로 국립공원과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를 책임졌던 WETA 스튜디오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한데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오클랜드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캠핑카의 냉각수 이상인 듯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본사에 연락했다. “미안하지만 캠핑카를 교체해 줄 테니 거기서 기다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걸리는데?” “글쎄다, 지금은 퇴근시간이라 사람이 없으니까 내일 아침에 기사가 출발하면 점심때나 도착할걸.” 느긋한 목소리였다. 이 나라에는 한국과 같은 24시간 다짜고짜 출동 서비스 같은 게 없는 것이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대부분의 회사가 업무를 종료하고 퇴근 이후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 실은 이쪽이 정상인 거겠지.


결국 뜻밖의 장소에서 계획에 없던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목적지인 오클랜드에서 차로 다섯 시간 거리의 타이하페라는 곳이다. 끝에서 끝까지 둘러보는 데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안달복달해 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자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고 선물가게에서 기념품을 사고 공원 비슷한 곳을 산책하고 장을 봐서 밥을 지어 먹었다.


다섯 시가 되자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슬슬 어둠이 깔리고 지나는 이 하나 없는 길거리는 괴괴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당구장도 노래방도 만화방도 심지어 술집의 네온사인도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이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가져온 책 두 권은 벌써 홀랑 다 읽었다. 그제야 비로소 처박아 둔 원고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캠핑카의 독서등을 켜고 샘소나이트 가방 안에서 원고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워 한 자 한 자 시간을 들여 읽어 나갔다. 마치 음식을 급하게 넘기는 습관 때문에 장염에 걸린 남자가 비로소 꼭꼭 씹기를 시작한 것처럼. 이걸 다 읽고 나면 정말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원고만이 구원이요 티비요 인터넷이었다. 이따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엉이 비슷한 새가 우는 소리도.


지금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조심조심 산길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읽기를 마쳤을 때 일행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고즈넉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리는 그런 밤이었다. 흥분한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물고 조금 전까지 푹 빠져서 읽었던 원고의 첫 줄을 떠올렸다. 이런 문장이었다. “위대한 설득자의 음험한 꿈속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운명이라는 표현은 상투적이지만 이 소설에 관해서만큼은 꼭 사용하고 싶다. 캠핑카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하룻밤을 보낸 곳이 오클랜드 같은 대도시였다면, 가져간 책이 두 권이 아니라 세 권이었다면 내가 원고를 읽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없었을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 제일 먼저 원고 검토를 맡긴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날의 기이한 체험과 원고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에서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겠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어떤 소설과 겨뤄도 뒤지지 않을 걸작이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북스피어에서 내고 싶습니다.” 막무가내로 보였을 수도 있는 내 제안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책이 바로 ‘북스피어X’입니다.


덧)

표지 공개,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그동안 다들 입이 근질근질하셨을 텐데 대관절 어떻게 참으신 겁니까. 빈말이 아니라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이 음험한 게임의 룰이 이렇게까지 잘 지켜질 줄이야. 감사해요, 정말. 


제목+표지 공개는 16일 자정(16일 화요일에서 17일 수요일로 넘어가는 그 시각)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구매할 형제자매님들을 위해 모쪼록 내일 자정까지 통신보안을 유지해 주시길.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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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제적 .. 스컬리 2017.05.15 16:2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오오... 일본 쪽일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네요
    ㅋ 이제 하루 남았다고 글 남기러 왔는데
    첫번 댓글이네요

    그렇게 운명적이라니!!!!
    더 기대되용!!!

    참 오늘 이와 손톱을 영화화한 석조저택살인사건을 봤어요
    재미있었어요~ 저런 내용이었나! 싶게!
    고수의 연인으로 나온 여배우 진짜 이쁘더라구요
    ㅋㅋ

    근데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무의식에. 남았는지
    약간 예상이 됐어요 ㅋ



  2. 2017.05.16 10:2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