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보로망의 기수 나탈리 사로트가 1939년에 출간한 책 『트로피즘』과 이름이 같은 트로피즘 서점은, 도미니카넌 서점만큼 웅장하거나 돈트 북스처럼 단아하진 않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한 브뤼셀의 명소다. 살아생전에 브뤼셀을 방문할 수 있다면 꼭 가봐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떼거리 서점 유랑단'이 결성되는 바람에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유럽의 수많은 아케이드 쇼핑물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는 생튀베르 갤러리의 화려찬란한 초콜릿 상점들 앞에서 얼마간 헤맨 끝에 우리는 트로피즘 서점에 도착했다.


서점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빛 천장과 벽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금빛 천장과 벽을 뒤덮고 있는 거울이었다. 혼란스럽다면 혼란스럽고 휘황찬란하다면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는, 전통적 형식과 결별하고 소설의 방법과 내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나탈리 사로트처럼, 책방 주인이 수십 년에 걸쳐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보던 와중에 귀결된 노력의 산물이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서점은 이처럼 독특한 인테리어 덕분에 유명해졌다.


트로피즘 서점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모두 그곳의 멋진 인테리어에 감탄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서점을 운영해 왔음을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하고 싶어졌다. 미국의 시티 라이츠 북이나 프랑스의 동굴서점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유지’와 ‘보전’ 같은 전통이 이들 서점을 유명하게, 혹은 가보고 싶도록 만든 것이리라. 그런 반면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보전이고 나발이고 ‘속도’와 ‘효율’이라는 미명하에 맨날 다 때려부수고 새로운 것만 추구해 온 듯하여 안타깝다고 할까. 우리 건 다 때려부수고 외국 나가서는 오래된 거 보면서 감탄하고 이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덧) 

위와 같은 서점 얘기들을 좀 길게 쓴 책이 다음 달에 나옵니다. 재밌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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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거짓말이다>를 만들면서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 씨를 알게 됐다. 그 인연으로 올 초부터 김탁환 선생과 함께 시작한 <꽃바다를 구하라> 프로젝트의 '파티'란에 지난 달쯤 댓글이 하나 달렸다. 이런 내용이었다.


"세월호를 취재했던 한겨레 기자 정은주입니다. 김관홍 씨는 홍대와 연남동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술친구입니다. 참 좋은 프로젝트라 1회부터 반가웠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후원이 늦었습니다. 괜찮으시면 글 품앗이도 한번 하고 싶습니다."


김관홍 잠수사에 관해서는 이쪽에서 뭔가를 부탁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와중에, 후원도 후원이지만 글 품앗이도 한번 하고 싶다는 말이 정말이지 고마웠다. 본인이 한겨레에 쓰는 글도 바쁠 텐데.



정은주 기자가 김관홍 잠수사와의 인연을 글로 풀어낼 용기를 낸 건, 김 잠수사의 큰딸 때문이라고 한다. "초등학생인 큰딸의 꿈이 사회부 기자라고..." 그 얘기를 전해듣고 김 잠수사가 얼마나 훌륭한 취재원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회부 기자들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랬구나. 언젠가 먼 훗날 "그때 정은주 선배의 글은, 내가 사회부 기자가 되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스칼렛 오하라적 전개가 이루어진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힘내시길, 큰 따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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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션 임파서블 3>에서 톰 크루즈가 ‘토끼발’이라 불리는 화학무기를 가까스로 획득한 후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곳을 기억하시는지. 그때 깨어나자마자 인질로 잡힌 아내 줄리아를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장면을 보며 두 가지가 궁금했었는데 ‘대관절 토끼발이란 무엇인가’와 ‘톰이 줄리아와 함께 나쁜 놈들을 몽땅 때려잡은 중국의 저 마을은 어디인가’였다. 이번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곳은 ‘시탕’이라는 수향마을이다. 중국 양자강 이남에는 예로부터 못이나 하천이 아름다운 여섯 개의 마을이 있는데 이를 ‘강남의 6대 수향마을’이라고 한단다. 내가 얼마 전에 간 곳은 여섯 군데 수향마을 중에서 시탕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우전으로 6,000명가량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시골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지난 2월에 공중파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동양의 베니스’니 뭐니 하며 연예인들과 함께 조명했으니 곧 한국 사람들로 들끓지 않을까 싶다. 이미 내가 갔을 때 중국말과 한국말이 같은 비율로 들렸다. 척 보기에도 한국에서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아웃도어 차림의 떼거리 여행객이 많았다. 근처에 산악지대가 있는 것도 아닌 마당에 적당히 평상복을 입어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거야 내 생각일 뿐이고 아웃도어 복장은 아웃도어 복장 나름의 편의성이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실례인 듯도 하다. 입을 만하니까 입었겠지.


우전은 간선수로를 따라 동책과 서책으로 나뉜다. 동책에는 소설 <영웅문>에 등장하는 구처기가 강남칠괴와 대판 싸우다가 별안간 사람 키만 한 항아리의 밑바닥을 쌍장이산의 초식으로 들어 올려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시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객잔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 이채롭다. 청나라 말기의 모습을 재현한 각종 박물관과 기념관은 번다한 민속촌을 연상시킨다. 반면에 서책은 상대적으로 물길이 넓고 그 물길을 이용하여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인지 동책보다 정겨운 느낌이었다. 고즈넉한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늘어선 촌락과 상점에 불이 켜지면 그야말로 굉장한 장면이 펼쳐진다. 그동안 중국 여행을 숱하게 했지만 ‘다시 한번 꼭 와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처음이다.



두 시간가량의 서책 일주를 끝내자 날이 어둑해졌다. 마지막 여정으로 배를 탔다. 이 배에 관해 설명하자면 뒤쪽에서 사공이 노를 저어야 하는 나룻배 형태로 객실은 지붕이 막혀 격자무늬 창을 통해서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대략 여섯 명에서 여덟 명이 양쪽으로 마주보며 앉는 구조다. 뱃삯은 어른 한 명당 60위안이었으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만 원이 약간 넘을까 말까. 내가 탄 배에는 한국인 남성 다섯 명과 조선족 청년, 그리고 묘령의 중국인까지 일곱 명이 함께했다. 서책 끝에서 초입까지 일직선으로 30분가량 운행하는데 처음 얼마간은 다들 창밖 경치를 구경하며 탄성을 지르기 바빴다. 한데 좀 전에 얘기했듯 객실의 구조가 답답해서인지 중반쯤 지나자 자매님에게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저 아가씨는 혼자 여행 온 모양이네(웃음)”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젊은 사람이 대범하다”느니 “가까이서 보니 미인”이라는 논평이 여기저기서 왁자하게 들려왔다. 문제는 자매님의 맞은편에 내가 앉아 있었다는 거다. 다만 몇 살이라도 젊어 보이는 네가 말문을 트는 게 좋지 않겠냐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잠시 고민해 보았다. 과연 말을 거는 게 온당한가. 물론 나도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고 왜 혼자 이곳에 왔는지. 하지만 ‘다수의 한국인 중년 남성들①’과 ‘소수의 중국인 젊은 여성②’이 본의 아니게 한 공간에 갇히게 된 미묘한 상황에서 질문의 방향이 ②-->①이라면 몰라도 ①-->②의 경우에는 상대의 쓸데없는 오지랖에 귀찮아하거나 불쾌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른 생각이었다. 싸잡아 비난하자는 건 아니지만 의아하다는 형제님들은 ‘택시 기사의 오지랖’으로 포털이나 트위터를 검색해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다음으로,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왜 혼자 이곳에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고작해야 “Where are you from?” 정도가 최선일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게다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을 걸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면 그게 여자든 남자든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겁이 나거나 귀찮다. 내가 겁나거나 귀찮으니까 당연히 남도 겁나거나 귀찮겠구나 생각하면 도무지 말을 걸 수가 없다. 이런 증상은 “도나 기에 관심 있으세요”가 횡행할 무렵부터 점차 심해졌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예전에는 종로나 광화문 일대에서 활보하던 세력들이 언젠가부터 동네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어오는 바람에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근절되지 않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쳐 주면 좋겠다.


자기 얘기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매님은 시종일관 창밖만 바라보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여론은 “쯧쯧, 말 한번 못 붙이다니 한심하군”으로 바뀌어 있었다. “젊은 친구가 저렇게 소심해서야”, “그럴 거면 나랑 자리를 바꾸든가” 같은 말도 이어졌다. 그냥 내가 소심한 걸로 귀결돼도 상관없었으련만 나도 모르게 “저기, 혼자 오신 모양인데 제가 사진이라도 찍어드릴까요?”라며 찰칵찰칵 시늉을 한 건 내가 정말로 소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조선족 청년이 통역해 주었다. 결과는 호쾌한 거절. 그러자 이번에는 조선족 청년에게 “어디서 왔는지”, “왜 혼자 왔는지”를 중국말로 물어봐 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청년은 망설이다가 “그건 좀 실례인 것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지금껏 중국인은 시끄럽고 예의가 없으며 때때로 무례하기까지 하다는 식으로 틈날 때마다 험담을 해왔다. 어쩌면 그날 이후로 중국인 자매님 역시 비슷한 견해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은 시끄럽고 예의가 없으며 때때로 무례하기까지 하다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지사지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싫은 기색 하지 않고 이것저것 친절하게 거절해 준 자매님께,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하지만 이렇게나마 정중하게 사과드린다.(한겨레)


덧) 

제가 그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이런저런 서점들을 꽤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때 느낀 단상과 사진들을, 만약에 책으로 엮으면... 읽어보고 싶으실까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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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21 01: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차단된 자 2017.03.21 10:2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럼요, 읽고 싶죠!!!
    원래도 여행하는 이야기랑 (막 익스트림 스포츠 하고 밤낮으로 사람 왕창왕창 만나는 내용보다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거 적은 이야기가 제 취향~)
    서점이나 책 이야기 좋아하는데 거기에 김사장님 글발까지...
    지금 예약주문 받으셔도 신청합니다. @_@

  3. 박은미 2017.03.22 12:2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읽고 싶어요. 여행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 좋아해요.
    다카기 나오코의 책을 다 좋아하거든요.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중국인 무리들이나 한국인 무리들이 똑같이 시끄럽대요.
    여행까지는 아니지만 혼자 다니는 걸 즐기는 저도
    항상 느끼는 건데 아저씨들이 혼자다니는 여자를 보면 길에 떨어진 물건 대하듯 하는구나
    느낄 때가 많아요. 역지사지라는게 정말 어렵긴 해요.
    여자들도 남자들의 마음이나 아저씨의 마음을 잘 모르긴 마찬가지잖아요.

  4. 치치 2017.03.22 18:5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오, 저도 꼭 읽고 싶어요!!